어릴 적 경험한 판자촌의 생활(1) 우리는 운명공동체였다 / 안희환
우리
집은 경기도 광명시 소하1동 500번지였다. 300여명(내 기억으로)이 사는 동네였는데 주소가 다 똑같았다. 집 같지도 않은 집에 산다고
개별적인 주소를 부여하지 않았는가보다. 따라서 우편배달부들은 주소로 편지를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름으로 편지를 전해주었다. 동네 사람들 이름을
속속들이 알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우리 동네의 집들은 뚝방 옆에 판자로 대충 두둘겨지은 집들이었다. 뚝방 옆에는 고수부지가 있었는데 그 고수부지 옆에는 안양천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안양천 너머에는 철길이 있었고 뚝방에 서서 지나가는 기차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안양천을 건너 철길에 다다른 후 철로 위에 못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했었는데 기차가 지나간 후의 못은 납작해져 있곤 했다.
우리 동네는 가난했지만 공동체 의식이 투철했다. 왜냐? 한 집이 불나면 나머지 연결된 집은 같이 불타야했으니까. 한 마디로 운명공동체였다. 따라서 누군가 실수로 불을 낸다면 그는 공동체의 반역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동네에서 추방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자나깨나 불조심. 우리 동네의 구호였다.
요즘 보면 공동체란 말을 많이 한다. 사회가 조직화되다 보니 사람과 사람의 끈끈한 만남이 사라지고 서로의 관계가 피상적이고 깊이 있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부딪히며 살아가야 하지만 막상 저마다 유리벽 안에 갇히기라도 한듯 다가가려 하면 느껴지는 차가운 거부감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의 운명으로 엮어진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해서 격리감을 느끼지 않고 강한 결속감 속에서 안정감을 얻고 싶은 것이다. 모래 알갱이같은 하나가 숱하게 늘어선 만남이 아닌 팔과 다리처럼 다른 지체이되 한 몸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좋은 결과를 공유할 수 있을 때 꿀 수 있는 낭만적인 꿈이지 최악의 것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하면 모두가 도망가 버리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릴 적 자라던 판자촌처럼 한 아이의 불장난으로 인해 모두가 한꺼번에 폭삭 망해버릴 수 있다고 하는 식의 공동체성은 그리 달가운 것일 수 없는 것이다.
부단히도 불조심하던 그때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만큼 불조심하고 살까 하는 질문을 머릿속에 띄어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 피식 웃고 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부터도 무감각해졌는데 무얼 더 물어볼까? 라이터를 들이대도 불이 붙지 않은 시멘트 벽을 두드려보며 대견해한다. 참 기특한 벽이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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