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할까? 갈6:1-10(2011.7.29. 금요예배 설교)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국민일보 1999년 4월 24일자에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7계명이란 글이 실렸었다.
① 섬기는 자세를 가지라. 남을 섬기는 사람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다.
② 칭찬을 아끼지 말라. 누구에게나 한 가지 장점은 있는 법이다. 험담은 위성보다 빠르게 퍼진다. 칭찬은 다리가 붙어 있다. 그러나 험담은 날개가 달려 있다.
③ 남의 이름을 잘 기억하라. 이름은 단 하나뿐인 개인의 존엄성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타인의 이름을 잘 기억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공통점이 있다.
④ 친절한 태도를 가지라. 무뚝뚝하고 굳은 표정은 사람을 내어 쫓는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그러나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질 수도 있다.
⑤ 용서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라.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내가 교만하기 때문이다. 나도 사실은 실수투성이다.
⑥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라. 상태의 기분을 무시하고 혼자서 줄기차게 떠드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⑦ 사람과 만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사람이 싫어지면 마음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이다.
여러분이 이중에서 어떤 것이 자신과 연결이 된다고 생각하시는가? 또 어떤 것이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시는가?
아마 저마다 평가하는 기준과 점수가 다르겠지만 인간관계란 것이 참 중요한 것인 반면 참 힘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감을 할 것이다.
근세 유명한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세 가지로 진단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이다. 이것은 오늘날에 많이 보여지는 관계이다. 실제로 오늘 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린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관계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부버는 또 하나의 관계로 '나와 그것의 관계'라고 이야기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그때 '나와 그것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한다. 참 멋진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이 나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인격으로 대한다? 멋진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부버는 이러한 인간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아마 진정한 인간관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버는 여기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다. 이것이 인간성의 연약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이 인간관계를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하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자 너'라고 이야기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웃과 친구와의 관계를, 그리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견고한 인격적 관계로 역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으로 부딪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을 발견하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아내,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남편,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본 내 이웃과 친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이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할까?”. 오늘 설교의 제목이다. 함께 말씀을 나눌 때에 서로 가져야할 성경적인 사람살이의 모습을 조명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 성령께서 나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능력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축원한다.
1. 자신을 향하여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할까?
이런 질문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에 앞에 먼저 생각해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훈련이야말로 다른 모든 관계 개선을 위한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다른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나 이 명령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용서, 그리고 사랑에 대한 명령이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자기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말이다
실제로 자신을 증오하거나 자기혐오에 빠져있 사람, 혹은 심한 열등감이나 자기 경멸에 빠져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알고 있다 치더라도 사랑할 여력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자기를 사랑치 않는 이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능력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결국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씀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1) 시험을 받을까 두려 하라.
첫째는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자신을 돌아보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에서 시험을 받는다는 말은 죄에 빠진다는 말이다. 즉 죄에 빠질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죄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한다”(롬3:23)
“죄를 지은 자는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지운다”(계)
심지어는 자비하신 예수님조차 죄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는 냉혹할 정도로 견고한 모습을 보이셨다.
눈을 빼라.
손을 찍으라.
과격한 표현을 하신 예수님. 그만큼 죄를 심각하게 보신 것임.
이것이 성경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이 보여주는 분명한 차이점이다. 하나님이 없는 이들에게는 죄가 일상적인 것이고 누구나 다 짓는 그저 그런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죄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죄는 암보다 두려운 것이다. 죄는 에이즈보다 두려운 것이다. 죄는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전염병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죄를 멀리하게 되는 것이고 작은 죄에도 아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엔 죄가 얼만 심각한 것인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청승맞게 보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라. 어둠 가운데 있으면 위험이 위험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에 빠지고 나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흉악한지 알게 되지 않겠는가?
화장실가다 빨래 줄에 목이 걸렸던 어린 시절. 어두워 보이지 않기에 다칠 줄도 모르고 달린 것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달리고 있음.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도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는 않은가? 독같이 죄 속에 뒹굴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라. “죄에 빠질까 두려워하라”
웨슬레의 말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두려워 할 것은 세상에 두 가지 밖에 없음.
긍정적인 면에서와 부정적인 면에서
바로 하나님과 죄.
2)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하지 말라.
둘째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해 교만이나 자만에 빠져있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여러분이여.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데는 자만심만큼 위험한 것이 없음
사울왕. 겸손할 때는 괜찮았는데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그 마음에 자만심이 싹이 났을 때 그는 스스로를 망할 길로 몰아갔다.
여리고전투에서 이긴 후 아이성과의 싸움에서.
자만에 대한 경구들이 참 많다.
자만은 마땅한 두려움도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죄다(섹스피어)
자존심은 어리석은 자의 소유물이다(헤로드토스)
교만은 모든 죄악의 왕이다. 교만이 올라오면 모든 덕은 물러간다. 너는 지난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현재 생활은 통곡할 만하고 죽은 뒤를 생각하면 두려운 것뿐이니 사람이 3가지를 늘 생각하면 능히 교만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성 베르나르드)
교만은 덕 속에 나와서 덕의 모습을 가장하고 덕을 해하는 것이다. 마치 나무 벌레가 나무에서 나서 나무를 해하는 것과 같다. 다른 악은 외부를 치는 것이나 교만은 영을 치는 것이다. 악은 한쪽만 치나 교만은 여러 면을 친다.(성 어거스틴)
대개의 큰 과오 밑에는 교만함이 있는 것이다.(존 러스킨)
교만 중에 영적 교만이 제일 크다(라인홀드니버)
교만은 천사를 떨어뜨려 마귀가 되게 하고 겸손은 사람으로 천사가 되게 한다. 교만은 어리석은 자에게 반드시 따르는 악덕이다. 자기애는 교만의 시초이다. 교만은 자기애이다. 억제되지 못 하였을 때 그 형체를 나타낸다. 인간의 교만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 권력의 교만, 지적교만, 도덕적 교만이다.(라인홀드 니버)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겸손이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교만이다(성안토니)
파리 한 마리도 인간보다 먼저 지어졌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그다지 교만해지지 않는다(탈무드)
이놈의 자만 때문에 사람들은 들어야 할 말을 안 듣는다. 목사로서 권면할 때 말을 잘 안 듣다가 나중에 낭패 보는 사람 참 많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들어야 할 것을 잘 안 듣는 사람은 자만에 빠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언제고 낭패를 보게끔 되어있다.
네 사람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엄청나게 배운 사람이고 범인들이 상상조차 못할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사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가운데 끼인 보통 사람은 그들로부터 대단한 천대와 멸시를 당하며 동행하고 이었다.
이들이 어느 숲속에 도달했을 때이다. 그들 앞에 죽은 사자가 길에 누운 채 나타났다. 지금껏 자기네들 지식과 기능을 자랑하던 사나이들은 각자의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한다면 이 사자를 살려 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통 사람이 말한다.
"당신들의 지식과 기능은 대단하지만 사자만은 살리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살아나면 먼저 우리부터 잡아먹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그들은 사자를 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제 곧 사자가 살아날 순간이었다. 그러자 보통 사람은 황급히 달려가 다시 한 번 그들을 만류했다.
"여러분들의 지식과 기술은 실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자만은 살리지 말아주시오"라고 통사정을 했다.
원래 스스로 잘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법이 없다. 셋은 무식한 녀석이 겁은 도 왜 그렇게 유난히 많으냐며 면박을 주었다. 그리고는 계속하여 그들은 사자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보통 사람은 하는 수없이 나무위로 올라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들의 작업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런 그를 보면서 잘난 사람들 셋은 멸시의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들은 사자를 살려내고야 말았다. 살아난 사자는 한 번 우렁찬 포효를 하더니 완전히 빈 자기의 뱃속을 채우는 일이 가장 급했던지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먹고 말았다.
인도의 동물 우화 "폰차탄트라"속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자만심을 갖지 마시길 바란다. 스스로 무엇인가 된 줄로 여기지 마시고 끝없이 배우고 경청하는 겸손의 모습을 갖추시기를 바란다. 그런 자세를 갖추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의 큰 힘이 될 것이다.
3)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셋째로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고 말씀한다.
각자마다 해야 할 일이 있음.
짐이란 것은 무거운 것
짐스럽다는 표현.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일해야 함
공부해야 함.
자기가 봉사할 것이 있어야 함.
목요일에 치환이 위해 기도. 열심히 공주하도록.
4)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에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 육신의 것을 거둠.
지옥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
안 믿지만
어느 극장에서 코미디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다. 이 코미디물을 구경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했다. 그 때 코미디 공연의 막이 올랐다. 공교롭게도 그와 때를 같이하여 화재가 발생하였다.
코미디 연극을 주도하는 사회자가 분장을 한 채로 관중에게 화재가 난 사실을 알렸다.
"여러분 지금 극장에 화재가 났으니 긴급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관중들은 한 사람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코미디언이 관중을 웃기기 위하여 하는 말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정말 극장에 불이 났습니다."
그래도 관중은 곧이듣지 않았다. 결국 극장 안에 있는 관중들은 진짜로 말한 코미디언의 말을 믿지 않다가 모두들 불에 타죽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지옥에 대해서 많은 책과 설교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으나 사람들이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지옥은 확실히 존재한다.
딕슨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만일 우리가 강단에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더 많이 했더라면 우리 사회에서 지옥과 같은 현실이 더 적어졌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
어떤 목사님의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던 한 부인이, 목사님에게 자녀가 있느냐고 물었다. 목사님이 있다고 대답하자, 그 부인이 물었다.
"그렇다면 질문할 것이 있는데요. 자녀가 고통 가운데 빠져 있어도 구해주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야 물론 그런 아버지는 폭군이나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목사님의 대답에 부인은 말했다.
"목사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권능을 가지시고 그 자녀들을 구원치 않고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폭군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참 대단히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이때 목사님은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부인, 부인께서는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에 있는 자녀들은 한 사람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옥에 있는 자녀들은 모두 마귀의 자녀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있거나 천국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위한 집을 따로 가지고 있고, 마귀는 그 자녀들의 집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볼테르 이야기.
옳다. 하나님은 다만 거듭난 자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아버지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변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자. 하나님은 선하셔서 벌을 내리실 분이 아니시다"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어느 날엔가 냉혹한 현실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구원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거절한 것임.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고 지금도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매주 전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 놓고 후에 딴소리하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
사실 교회 안의 많은 문제는 성령을 위해 심으려 할 때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반면에 별 영양가도 없는 육신의 것들을 가지고 심어 나갈 때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키고 결국은 죽어질 것을 거두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2. 목회자를 향하여
1)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
목회자와 성도간의 가장 중요한 관계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 가르치는 자임. 무엇을? 말씀을.
들썩이기만 하는 것은 남는 게 없음. 말씀으로 양육해야 함.
오늘날 수많은 병든 신자들. 왜 인줄 아는가? 말씀으로 철저히 가르침 받을 생각을 안 하고 오히려 다른 것들을 쫓아가고 목회자들에게도 다른 것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여. 여기 저기 쫓아다니지 마시라. 자기 영혼만 망친다.
어떤 집사님. 방배에 기도 받으러 감. 영이 맑으니 어쩌니. 헛소리.
순복음 교인 하나. 작은 교회는 해결 못 한다고 큰 교회 가서 큰 기도 도움 받으라고... 그 무슨 헛소리. 그래서 해결? 천만에 더 악화됨.
말씀을 통하여 차곡차곡 가르치는데 속성의 길을 찾다가 낭패만 당함. 결국은 그동안 공들인 것만 헛수고가 됨. 그전에 분명히 말씀으로 가르치면서 조급하지 말라고 했고 자꾸 물러나 엉뚱한 것 찾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고 맘. 뒤늦게 전화하면서 후회하지만 늦었음.
다시 말한다.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고,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그것임.
바울이 한일이 그것임.
제자양육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임.
2)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리고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오늘 성경은 말씀한다.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모든 좋은 것”.
한때의 생각. 너무 대접받지 말자는 생각. 그러나 그것이 부작용. 그리고 성도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 목회자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임.
김홍도 목사님의 이야기. 그 어머니의 목사님 대접. 김홍도 어린이의 욕.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고 자기가 잘못임을 알게 됨.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또 이상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다. 바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만. 자기가 목회자이니까 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계시대로 공평하게 말함. 지금은 대상이 교회와 성도이기에 목회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또 목회자에게는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하는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디모데전서-감독의 조건
"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장)
디도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장)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것 따로 있음.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 20장)
오늘 본문에서는 감독자와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임.
중이 제 머리 깎아서 미안하지만 오늘 말씀에 있으니 건너 뛸 수 없다. 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시길 바란다. 이미 그렇게 하는 분들이 있음. 집 앞에 놓여있는 훌라라 치킨. 김경숙 권사님. 밤중에 고민. 성도들이 섬겨줌. 잘하는 것임.
더욱 중요한 원칙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장)
즐거움으로 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
3) 성경의 실례
고넬료.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행 10장)
고넬료는 권세가가 왜 그리 저자세? 상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에.
아브라함.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장)
열심히 죽을 고비 넘기며 싸운 아브람이 예물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거꾸로임. 왜? 멜기세덱은 제사장이기에.
루디아
“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장)
지금의 제사장은 모든 사람.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측면. 말씀을 가르친다는 측면까지 포함된 것은 아님. 물론 평신도 지도자들도 있지만 어쨌든 목회자와의 관계를 말씀대로 따르시길 바란다.
3. 이웃을 향하여
1) 범죄한 자를 바로 잡으라
첫째로 범죄한 자를 바로잡으라.
예수님의 말씀.
상대가 죄를 범하면 일대일로 권면
그래도 안 들으면 두세 사람이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적으로
그래도 안 들으면 이방인과 같이 여겨라.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으심. 오늘날 교회가 치리 기능을 잃어버림.
물론 예수님의 진짜 마음은 범죄자를 돌이키게 하는데 있음. 오늘 말씀 따라 바로 잡으려 하시는 것임.
여러분. 교회에서 범죄자를 내버려 두어선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바로 잡아야 하는가?
-죄의 심각한 결과 때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옥은 실제 함. 그러니 지옥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임.
-죄의 파급효과 때문임.
아담에게서 하와
그리고 가인에게 후에 라멕에게
누룩과 같은 죄
전염병과 같은 죄
잡족의 불평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임. 죄는 번져감.
분명할 때 내버려둘 수는 없음.
그러나 온유함으로 잡으라는 말씀. 우리는 심판자가 아님. 우리도 연약한 자임. 그리고 한 형제와 자매임.
혈기나 고압적인 태도는 안 됨. 그런 태도는 반감만 사게 됨. 그리고 사랑이 결여된 태도임. 사람이 결여된 추궁과 고압적인 태도는 범죄자를 돌이키게 못함. 죄인 삭개오를 변화시킨 것은 고압적인 책망이 아닌 삭개오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온유하신 태도였음.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둘째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사랑의 법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루살렘교회에서 보여진 구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다른 지역의 교회들.
서로 돌아보는 것. 권면의 은사가 왜 있는가?
바나바의 사역이 왜 그리 귀했나? 권위자(권면자)이기에.
지금 우리 교회. 분위기가 좋음. 특별히 예배 시간.
또 서로 관계도, 그리고 새로운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분위기가 좋음. 트러블이 좀 있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 사람살이에 트러블이 없으면 그것이 비정상. 초대교회에도 있었으니...
어쨌든 이런 가족 같은 분위기를 교회가 성장해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란다.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 보면 서로 짐을 져주시기 바란다.
기도의 짐을 지는 자가 많으면 좋겠음. 다른 이의 고통을 내 것으로 짊어지고 기도하는 자가..
3)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
셋째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
기회가 있는 대로
특별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추운 겨울에 직업을 잃게 된 돈리는 죽기보다 싫은 구걸을 해야만 했다. 그는 어느 고급식당 앞에 서서 한 부부에게 동정을 구했다. "미안하오. 잔돈이 없소"하며 남자가 퉁명스럽게 거절하자, 함께 가던 여인이 말했다. "이렇게 떨고 있는 사람을 밖에 두고 어떻게 우리만 들어가 식사를 할 수 있죠? 여기 1달러가 있어요. 음식을 사 잡수시고 용기를 잃지 마세요. 그리고 직업을 찾도록 기도하겠어요"
그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부인은 나에게 새 희망을 주셨습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부인은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예수님의 떡을 먹는 거예요. 이 떡을 다른 이에게도 줄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1달러를 받은 돈리가 50전을 남기고 50전으로 요기하고 있을 때 바로 앞에서 한 노인이 자기를 한없이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머지 50전을 꺼내어 그 노인에게 빵을 사주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조금 떼어 먹던 빵을 종이에 싸고 있었다.
돈리가 물었다. "내일 먹으려고 싸갑니까?"
"아니오. 저 길가에 꼬마 신문팔이가 있어요. 그 놈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오."
두 사람은 빵조각을 가지고 아이에게 갔다. 아이가 허겁지겁 빵을 먹는데 길 잃은 개 한마리가 다가왔다. 그 아이는 나머지 빵조각을 개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그 소년은 기쁨으로 신문을 팔러 뛰어가고 노인도 일감을 찾으러 뛰어갔다.
'나도 이렇게 있을 수 없지'하며 돈리는 길 잃은 개의 목에서 주소를 찾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주인은 너무 고마와하면서 10달러를 주며 말했다.
"당신같은 양심적인 사람을 내 사무실에 고용하고 싶소. 내일 나를 찾아오십시오"
돈리는 그 작은 빵 속에 임재 하는 새로운 생명의 움직임을 느끼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4. 최고의 원리
이런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최고의 원리가 언급되고 있음.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 낙심하지 말라
왜 낙심하나?
-결과가 빨리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게 애를 썼는데 자신의 변화가 없음. 타인의 반응도 동일함. 여기에서 낙심.
특히 현대인들은 조급증에 걸려있어서. 인스턴트 문화에 길들려 있어서.
-상황이 악화되어서
며느리에게 잘했는데 며느리의 태도가 더 악해졌다고 생각해 보라
아들에게 공들였는데 아들의 상태가 너 나빠졌다면
열심히 기도하고 내가 숙이고 들어갔는데 상대방이 더 형편없이 다가오면
내 배우자에게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더 파악해지면(실은 배우자에겐 자식 반만큼도 공을 안들임)
-자신이 약해져서
사실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상대가 더 악화되지도 않았더라도 심령이 약해지면 낙심이 됨
마음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남들이 봐서,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별문제가 없는데 낙심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약해져 있기 때문임.
우리 모두는 간혹 이런 경험들을 함. 별 이유 없이 침체되고 낙심에 빠지는 것.
그러나 오늘 본문에 말씀함. 낙심하지 말아라.
2) 왜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가?
때가 되면 거두기에.
만사에 때가 있음. 전도서.
아브라함이 사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는 때
요셉이 온갖 누명과 억울함을 벗고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때
다윗이 왕이 되는 때
바벨론 포로 기간이 끝나는 때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시는 때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주로 다시 오시는 때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때가 있음. 믿으시기 바란다.
교회가 부흥하는 때가 있음
배우자가 돌이키는 때
자녀들이 철드는 때가 있음.
내 자신을 향해 이웃을 향해 좋은 인간관계를 엮어갈 수 있는 때(정말 중요하지 않은가?)
3) 그러기 위한 하나의 조건
포기하지 말라!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교회 장로 한 분이 심장 질환을 앓아오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한 외과 의사는 그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으며, 또 살아난다 해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슐러 목사님은 그가 입원한 직후에 병원에 들렸는데,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인 스마일리 브랜튼 박사의 얘기를 생각했었다.
"두개골 부분에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뇌에는 정상적인 부분도 아주 많습니다."
슐러 목사님은 그 이야기를 믿으며 교회의 장로가 들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서 이렇게 얘기했다.
"스탠리 씨, 슐러 목사입니다. 당신은 회복될 것이라더군요."
그러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첫 번째 표식이었다.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으면서도 스탠리 씨는 꿈을, 자신은 회복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스탠리 씨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교회에 왔는데 목발도 없이 주위를 걸어다녔다. 슐러목사님은 뛰어나가 그를 맞이하였고,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목사님,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슐러목사님은 대답했다.
“스탠리 씨, 위대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슐러목사님은 말한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한다는 것은 오직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꿈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꿈이 깨어지도록 버려두시지는 않습니다.
따가 이르매 거둔다. 다만 포기하지 말라. 이 말씀은 나에게 얼마나 많은 힘을 주는지 모른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이 말씀을 되뇌며 나의 믿음을 불로 일으킨다.
결론
-자기 자신
시험에 빠질까 두려워하라
스스로 된 줄 생각지 말라
자기 짐을 지라
성령을 위해 심으라
-목회자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웃
범죄한 자를 바로 잡으라. 온유함으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
때가 이르면 거둔다. 결코 포기하지 말라.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고 옛날 자신이 다니던 작은 교회 옆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
1943년 전시 내각을 수립하고 독일 비행기가 하루에 1천여 대 씩 런던을 폭격할 때, 근 하루에 18시간씩 근무를 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 중에 BBC 방송을 통해서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땀과 피와 눈물밖에 바칠 것이 없다' 라고 전영국군에게 호소하자, 그 방송을 들은 영국군은 3일밖에 먹을 수 없었던 양식을 가지고 보름이나 견디면서 싸워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단한 처칠 경이 고등학교 시절에는 영문학에 낙제를 했던 사람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포병학교에, 그것도 명문의 자제라는 특전 때문에 입학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대단히 똑똑한 사람들이 감히 발꿈치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후에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쓰고 나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가 은퇴한 후에 한번은 그의 모교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처칠 경은 지팡이를 짚고서 단 위로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대선배이신 처칠 경이 말씀하실 때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모조리 받아쓰십시오"
처칠 경은 지팡이를 짚고 강단에 서서 두꺼운 안경 너머로 학생들을 한참 동안 응시하더니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는 뚜벅뚜벅 걸어 내려갔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도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을 대하자. 자기 자신을, 목회자를, 그리고 이웃을.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갈까?”. 이 말씀대로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이 말씀에 순종해 나갈 때 우리는 나와 이웃의 멋진 만남들을 엮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결단하시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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