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편지) - 김성민
지난 4월 28일, 나는 미국의 대표적 북한인권운동가 수잔 쑐티와 그의 동지들에 의해 주도된『북한자유주간』행사 차 미국에 갔다가 뜻밖에도 백악관의 부시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들과 북한 주민들의 애환, 북한의 민주화를 위한 간절한 뜻을 내나라 대통령이 아닌 타국의 대통령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비분이 끓었던 반면, 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와 인권존중에 입각한 여러분들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어서 벅찼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짧았던 시간의 이야기지만 희망이 되고, 삶의 의지가 되라고 밤새워 쓴 장문의 글을 고향의 하늘에 띄워 보냅니다. 너무나 일찍이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 어머니. 저 때문에 지금도 남다른 고생을 하고 계실 누님들, 나의 옛 중대장동지, 선전부장동지,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
그날, 오전 열한시였습니다. 북한에 납치된 요코타 메구미양의 어머니와 동생, 주미 일본대사가 맨 앞에 섰습니다. 그 뒤에 한미 엄마와 한미의 손목을 잡은 광철씨가 섰고요. 백악관의 주인은 문가에 서서 가벼운 인사말을 던지며 손님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한미를 보고는 귀엽다고 하면서 번쩍 안아 올렸고 곧이어 무거워 죽겠다는 듯 “어이쿠”소리를 연발했습니다. 그러는 부시대통령의 볼에 한미가 입술을 가져다 대며 “아일러브 유”하고 속삭였는데, 한미의 영어 발음이 그럴듯했습니다.
이젠 그만 자리에 앉자면서 손님들을 안내하던 부시대통령이 언뜻 고개를 돌렸습니다. 나를 보고 “군인이지?”하고 물었습니다. 한미에게 빠졌던 대통령이 돌아서는 바람에 악수조차 못하고 주춤거리던 나는 “그렇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부시대통령의 오른팔이 나의 어깨를 휘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사진사를 불렀고 어깨동무마냥 친근한 포즈를 취해 주었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자리에 앉으면서 35평이 될까 말까한 오벌 오피스(부시 대통령의 집무실)를 둘러보았습니다. 응접탁을 중심으로 양편에 5~6인용 소파가 놓여 있었고 그 앞쪽에 대통령과 부대통령이 사용한다는 두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에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무실의 구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어서 자리를 잡고 앉으라고 하던 부시대통령이 다시 한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또 한 번 한미를 안아 올렸습니다. 조금은 힘에 부쳐 보였지만 한미를 안은 내내 웃기만 했습니다. “대통령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한미가 입을 열자 “고마운건 나다”고 하면서 자신의 옆 자리에 한미를 앉혔습니다. “몇 살이냐?” 부시대통령이 묻자 한미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 일곱 개를 활짝 펴 보였습니다.
드디어 일행과의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요코타 메구미의 어머니 사키에씨에게 고개를 돌린 부시 대통령이 “그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 통역만 되고 우리말이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후에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만, 사까이씨의 목소리가 참으로 부드러웠고 머리칼 한 오리도 흔들리지 않던 단정한 자세가 방안의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사까이씨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질수록, 부시대통령의 얼굴은 붉게 상기됐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리면 울릴수록 방안에는 침통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부시대통령과 저희 일행을 사이에 두고 두 줄로 않아서 대화내용을 기록하던 15명 정도의 백악관 관계자들도 한결같이 상기된 표정들이었습니다. 모진 슬픔을 안은 어머니의 모습이 저런 것이라면 슬픔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따로 있음을 마음속에 담아 두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사까이씨는 실종당시 딸의 사진을, 구원을 바라는 어머니의 소원인양 대통령에게 내어 밀었습니다. 그리고는 일본 납북자단체의 소망이 담긴 리본모양의 파란 배지를 들고 대통령에게 다가 갔습니다. “남이 달아주면 찔릴 수 있으니 내가 달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부시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양복 앞섶에 리본을 달았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쭝긋거리는 바람에 웃음이 터졌고 방안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자, 이젠 당신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고생이 많았다면서?” 부시대통령이 자세를 바꾸어 광철씨(한미 아빠)에게 했던 이야기였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저희가족을 만나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고향사람들이 굶어죽고 말 한마디 잘못 했다고 마구 잡혀가 공개총살당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까딱 잘못하면 우리도 죽겠구나 싶어 탈북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광철씨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임신 5개월의 아내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던 일, 중국 땅 여기저기를 헤매며 짐승처럼 쫓겨 다니던 기막힌 탈북자의 행로를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고통스럽던 지난날을 떠올리기가 서러웠던지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향미 아빠에게 부시대통령은 “이방에 들어오면 조금 떨린다는 사람들이 있던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야기 해 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대통령을 향해 이번에는 한미 엄마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짐승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이제 막달이 되었습니다. 한미를 낳기 전에 저희들은 밤새 의논을 했습니다. 성인들도 산다는 담보가 없는데 애를 낳아서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다, 그래도 애는 낳아야 한다, 배속의 애에게야 무슨 죄가 있는가, 그렇게 몇 날 몇 밤 의논을 하다가 애를 낳게 되면...남에게 주어서라도 살게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고...”
“대통령님”광철씨가 다시 말을 받았습니다. “정말 죽으면 죽었지 내 자식을 남에게 내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온 가족이 죽으면 함께 죽고 살면 함께 사는 길을 택하자, 중국 땅에 있는 아무나라 대사관에 들어가기만 하면 살수도 있다는데 한번 모험을 해 보자, 하고 생각을 모았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단독으로 그런 결심을 했는가”고 대통령은 다시 광철씨에게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중국에서 그렇게 중요하고 떨리는 일을 혼자서 결심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시 탈북자들을 도와주던 문국한선생을 만났고 미국의 남신우선생과 수잔쑐티 여사를 알게 되어 중국주재 일본대사관 진입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진이 그때 저를 도와준 선생님들과 기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던 일본 영사관 진입당시의 사진입니다” 그러면서 광철씨는 중국공안을 뿌리치며 일본영사관으로 진입하던 당시의 ‘가족사진’을 대통령에게 내어 밀었습니다.
“선물인가?”고 부시대통령이 물었습니다. “예, 저희 가족이 대통령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번에는 한미의 엄마가 밤새 준비한듯 싶은 딸의 그림(부시대통령을 형상한 그림과 그 아래 "부시 대통령아저씨, 고맙습니다" 는 글이 새겨져 있었음)을 대통령께 정중히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살 어린애가 그린 어설프기 그지없는 그림이었지만 대통령은 마다하지 않았고 문국환씨가 최근 발간한 “좋은 이웃”이란 탈북자관련 소책자도 “좋은 선물 감사하다”면서 받아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언뜻 시계를 보았는데 한사람, 한 가족과의 대화시간이 10분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긴박함이 암시되고 있었습니다. “군인, 몇 살인가?” “마흔 다섯 살입니다” 저를 향한 부시대통령의 질문에,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답변했습니다. “생각보다 젊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북한을 떠났나?” “그래서?” “OK!” “계속해 보시오”... 한미가족의 가슴 아픈 분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는지, 저를 향한 부시대통령의 질문은 거의나 공격적이었습니다. 굶어죽는 북한사람들을 목격하면서 체제에 대한 환멸이 왔고, 평소에 자주 듣던 미국의 소리방송과 자유 아세아방송, 한국방송을 들으며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 탈북자들이 대북한 방송도 하고 북한주민 계몽을 위한 삐라도 뿌리고 있다. 황장엽전노동당비서의 지도를 받으며 조직된 북한민주화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이러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한국정부에서 달가워하지 않으니 외롭다, 대통령각하께서 나서서 도와 달라...
“오케이. 알았다. 이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중국으로 탈북한 후 어려움이 없었는가? “왜 없었겠습니까. 밀선을 타고 한국에 입국하려다가 대련 항에서 중국공안에 붙잡혔습니다. 전 인민군 대위였고, 정치망명을 요구한다고 하자 웃기는 소리 그만하라면서 수갑을 채워 강제로 북한에 보냈습니다. 북한의 온성군 보위부에서 ‘반역자’의 감투를 쓰고 얻어맞다가 평양의 군 보위사령부로 호송되던 중 열차에서 뛰어 내려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고 1999년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용감하구만” “대통령각하, 고생을 했으면 저보다 열배는 더했고, 용감하면 저보다 백배는 더 용감한 탈북자들이 수천, 수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살기위하여...”
역시나 “알았다”고 말문을 막은 부시대통령이 이번에는 “한국 국민들이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당신은 김정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예기치 못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시대통령과의 면담직전에 우리가 만났던 NSC 국장은 대통령께서 개인적인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미리 해 주었었습니다. 짧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내가 통역을 맡은 분에게 ‘인민군대위’ ‘정치장교’ ‘친북단체’등의 대명사 번역을 준비해 두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또 다른 백악관 관계자가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족의 반역자 김정일을 찾아가 악수하는 순간부터 남한에서는 백성들과 김정일을 가려보지 못하는 일종의 몽유병이 감돌기 시작했고, 지금은 친북이 추세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을 미워하고 북한주민들을 사랑하는 진정한 우익 보수세력이 열심히 대항하고 있으며...” “오케이,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다”
“대통령 각하!” 이야기가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 갈까보아 무턱대고 외쳐버렸습니다. “대통령각하.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김정일을 용서할 수 있는 원수가 아니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주에! 이 밝은 세상에! 300만의 백성들을 굶어 죽게 만들고, 어제도 오늘도 끊임없는 공개총살을 명령하고 있는데! 그 쬐꼬만 놈이, 그,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가 위대한 지도자라는게 말이나 됩니까!”
이거라구야. 마음이 격해지자 눈에 눈물까지 맺히는게 창피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그 아까운 몇 초 동안 그냥 입술만 깨어 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부시대통령의 강열한 눈빛을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말해 보라는 듯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찡긋해 보였습니다. “그새끼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장엽선생님이 늘 하시는 이야기처럼 그놈은 신념도, 용기도, 비전도 없는 놈입니다. 김정일이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속은 텅텅 곯아 있습니다. 전번에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저 뒤에 계시는 힐 차관보가 김계관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렇게 원칙적으로 밀어붙이면 꽁지를 내려 버리는게 김정일이란 말입니다.”
한껏 격앙되어 있는 나에게 부시대통령은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래, 우리가 탈북자들을 돕고 북한주민들을 돕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 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남한생활과 북한민주화운동에서는 나의 선배이지만 고향 소학교에서는 후배임이 분명한 강철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부시대통령으로부터 그가 받았던 질문을 내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중국에서 떠돌고 있는 10여만의 탈북자 전체를 미국이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미국에 받아들이는 것은 본인들은 물론, 북한주민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권법이, 대통령각하께서 직접 싸인 하신 북한인권법이 하루빨리 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수잔쑐티와 북한자유연합이 주도한 북한자유주간의 취지도 그것이고 황장엽선생이 이끄는 우리 북한민주화위원회의 바램도 그것입니다. 다음으로, 북한주민들을 계몽하고 그들을 민주화운동에로 고무하기 위한 탈북자들의 단파방송, 북한으로의 삐라 보내기 위한 사업도 적극 지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일을 잘 알았다. 탈북자들을 미국에 받아들이는 일은 추진 중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이제 기자들을 불러들여 내가 직접 당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겠다”...
먼저 사진기자들이 들어와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는 관계자들의 안내에 따라 들어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질서 정연하게 ‘퇴장’을 했고, 이어 30여명의 또 다른 기자들이 TV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부시대통령을 마주 했습니다. 순간, 한미를 안고 응석을 받아주던 부시대통령의 미소 짓던 얼굴은 간곳이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눈앞에는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부시의 근엄한 모습만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아래는 그때, 부시대통령이 국내외 기자들을 통해 세계의 양심과 북녘형제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방금 전 내가 이곳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통령으로 재임한 후 가장 감동적인 만남중 하나를 가졌다. 나는 그녀의 딸과 그의 동생과 재회하기를 갈망하는 한 어머니와 오빠를 만났다. 그들은 북한 정부가 그들의 딸을 10대 일 때 납치함으로써 헤어져 살아왔다. 그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녀의 딸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한 국가가 납치를 조장한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미국인들에게는 어떤 국가의 지도자가 어린 아이의 납치를 부추긴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떼어놓는 것은 비정한 나라이지만, 바로 그것이 북한의 행위로 인해 이들 엄마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만일 북한이 세계에서 존경을 받길 원한다면, 그 나라부터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만 하고 이들 엄마가 그녀의 아이를 다시 껴안을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나는 또한 자유의 품에서 살고 싶어서 독재의 마수를 탈출한 한 젊은 북한인 가족과 얘기를 나눴다. 이 젊은 부부가 중국으로 가는 강을 건널 때 엄마는 5개월 된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그곳에서 자라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중국을 떠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의 장래에 대해 깊은 걱정을 하게 되었다. 아이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어떤 어머니나 아버지도 같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잔혹한 사회,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자라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신의 은총으로 어떤 숨을 곳을 찾았고, 아이는 태어났으며, 지금 이곳 백악관 집무실에 안전하게 앉아있다.
나는 또한 북한을 탈출한 한 용기 있는 사람과 얘기를 했다. 그는 북한군에 있었다. 그는 북한 정권의 야만적 속성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했고 그의 마음은 그것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쫓아 탈출했다. 그는 지금 북한을 탈출한 수천 명의 사람들,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자유와 그들이 인간답게 대우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웅변하고 있다.
세계는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과 맞서 싸울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놀라운 용기를 가진 사람들, 한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 전직 군인, 그리고 동생을 나의 집무실로 초대한 것은 나에게 영광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환영한다. 나는 여러분이 여기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미국이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임을 분명히 다짐한다. 우리는, 북한인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자유롭고 희망찬 세계에서 키울 수 있도록, 다시는 이런 어머니가 납치된 딸을 걱정하며 살지 않도록 하기위해, 자유를 위해 힘차게 노력할 것이다.
신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 있기를. 와 주셔서 감사하다.”
이렇게 이야기 한 부시대통령은 백악관을 나서는 우리들에게 볼펜과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넥타이핀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는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드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통령각하, 큰 뜻을 품고 한국으로 오신 황장엽선생을 모시고 우리 탈북자대표들이 다시 찾아뵙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나의 옛 중대장동지, 선전부장동지,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다시 한 번 희망을 품어 봅시다. 그렇게 오래가는 고통이라면 한번쯤 죽을 각오로 세상을 바꾸는 일꾼이 되는 용기를 가져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06년 5월 김성민 올림
짧았던 시간의 이야기지만 희망이 되고, 삶의 의지가 되라고 밤새워 쓴 장문의 글을 고향의 하늘에 띄워 보냅니다. 너무나 일찍이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 어머니. 저 때문에 지금도 남다른 고생을 하고 계실 누님들, 나의 옛 중대장동지, 선전부장동지,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
그날, 오전 열한시였습니다. 북한에 납치된 요코타 메구미양의 어머니와 동생, 주미 일본대사가 맨 앞에 섰습니다. 그 뒤에 한미 엄마와 한미의 손목을 잡은 광철씨가 섰고요. 백악관의 주인은 문가에 서서 가벼운 인사말을 던지며 손님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한미를 보고는 귀엽다고 하면서 번쩍 안아 올렸고 곧이어 무거워 죽겠다는 듯 “어이쿠”소리를 연발했습니다. 그러는 부시대통령의 볼에 한미가 입술을 가져다 대며 “아일러브 유”하고 속삭였는데, 한미의 영어 발음이 그럴듯했습니다.
이젠 그만 자리에 앉자면서 손님들을 안내하던 부시대통령이 언뜻 고개를 돌렸습니다. 나를 보고 “군인이지?”하고 물었습니다. 한미에게 빠졌던 대통령이 돌아서는 바람에 악수조차 못하고 주춤거리던 나는 “그렇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부시대통령의 오른팔이 나의 어깨를 휘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사진사를 불렀고 어깨동무마냥 친근한 포즈를 취해 주었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자리에 앉으면서 35평이 될까 말까한 오벌 오피스(부시 대통령의 집무실)를 둘러보았습니다. 응접탁을 중심으로 양편에 5~6인용 소파가 놓여 있었고 그 앞쪽에 대통령과 부대통령이 사용한다는 두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에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무실의 구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어서 자리를 잡고 앉으라고 하던 부시대통령이 다시 한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또 한 번 한미를 안아 올렸습니다. 조금은 힘에 부쳐 보였지만 한미를 안은 내내 웃기만 했습니다. “대통령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한미가 입을 열자 “고마운건 나다”고 하면서 자신의 옆 자리에 한미를 앉혔습니다. “몇 살이냐?” 부시대통령이 묻자 한미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 일곱 개를 활짝 펴 보였습니다.
드디어 일행과의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요코타 메구미의 어머니 사키에씨에게 고개를 돌린 부시 대통령이 “그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 통역만 되고 우리말이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후에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만, 사까이씨의 목소리가 참으로 부드러웠고 머리칼 한 오리도 흔들리지 않던 단정한 자세가 방안의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사까이씨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질수록, 부시대통령의 얼굴은 붉게 상기됐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리면 울릴수록 방안에는 침통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부시대통령과 저희 일행을 사이에 두고 두 줄로 않아서 대화내용을 기록하던 15명 정도의 백악관 관계자들도 한결같이 상기된 표정들이었습니다. 모진 슬픔을 안은 어머니의 모습이 저런 것이라면 슬픔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따로 있음을 마음속에 담아 두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사까이씨는 실종당시 딸의 사진을, 구원을 바라는 어머니의 소원인양 대통령에게 내어 밀었습니다. 그리고는 일본 납북자단체의 소망이 담긴 리본모양의 파란 배지를 들고 대통령에게 다가 갔습니다. “남이 달아주면 찔릴 수 있으니 내가 달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부시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양복 앞섶에 리본을 달았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쭝긋거리는 바람에 웃음이 터졌고 방안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자, 이젠 당신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고생이 많았다면서?” 부시대통령이 자세를 바꾸어 광철씨(한미 아빠)에게 했던 이야기였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저희가족을 만나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고향사람들이 굶어죽고 말 한마디 잘못 했다고 마구 잡혀가 공개총살당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까딱 잘못하면 우리도 죽겠구나 싶어 탈북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광철씨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임신 5개월의 아내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던 일, 중국 땅 여기저기를 헤매며 짐승처럼 쫓겨 다니던 기막힌 탈북자의 행로를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고통스럽던 지난날을 떠올리기가 서러웠던지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향미 아빠에게 부시대통령은 “이방에 들어오면 조금 떨린다는 사람들이 있던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야기 해 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대통령을 향해 이번에는 한미 엄마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짐승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이제 막달이 되었습니다. 한미를 낳기 전에 저희들은 밤새 의논을 했습니다. 성인들도 산다는 담보가 없는데 애를 낳아서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다, 그래도 애는 낳아야 한다, 배속의 애에게야 무슨 죄가 있는가, 그렇게 몇 날 몇 밤 의논을 하다가 애를 낳게 되면...남에게 주어서라도 살게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고...”
“대통령님”광철씨가 다시 말을 받았습니다. “정말 죽으면 죽었지 내 자식을 남에게 내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온 가족이 죽으면 함께 죽고 살면 함께 사는 길을 택하자, 중국 땅에 있는 아무나라 대사관에 들어가기만 하면 살수도 있다는데 한번 모험을 해 보자, 하고 생각을 모았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단독으로 그런 결심을 했는가”고 대통령은 다시 광철씨에게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중국에서 그렇게 중요하고 떨리는 일을 혼자서 결심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시 탈북자들을 도와주던 문국한선생을 만났고 미국의 남신우선생과 수잔쑐티 여사를 알게 되어 중국주재 일본대사관 진입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진이 그때 저를 도와준 선생님들과 기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던 일본 영사관 진입당시의 사진입니다” 그러면서 광철씨는 중국공안을 뿌리치며 일본영사관으로 진입하던 당시의 ‘가족사진’을 대통령에게 내어 밀었습니다.
“선물인가?”고 부시대통령이 물었습니다. “예, 저희 가족이 대통령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번에는 한미의 엄마가 밤새 준비한듯 싶은 딸의 그림(부시대통령을 형상한 그림과 그 아래 "부시 대통령아저씨, 고맙습니다" 는 글이 새겨져 있었음)을 대통령께 정중히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살 어린애가 그린 어설프기 그지없는 그림이었지만 대통령은 마다하지 않았고 문국환씨가 최근 발간한 “좋은 이웃”이란 탈북자관련 소책자도 “좋은 선물 감사하다”면서 받아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언뜻 시계를 보았는데 한사람, 한 가족과의 대화시간이 10분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긴박함이 암시되고 있었습니다. “군인, 몇 살인가?” “마흔 다섯 살입니다” 저를 향한 부시대통령의 질문에,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답변했습니다. “생각보다 젊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북한을 떠났나?” “그래서?” “OK!” “계속해 보시오”... 한미가족의 가슴 아픈 분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는지, 저를 향한 부시대통령의 질문은 거의나 공격적이었습니다. 굶어죽는 북한사람들을 목격하면서 체제에 대한 환멸이 왔고, 평소에 자주 듣던 미국의 소리방송과 자유 아세아방송, 한국방송을 들으며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 탈북자들이 대북한 방송도 하고 북한주민 계몽을 위한 삐라도 뿌리고 있다. 황장엽전노동당비서의 지도를 받으며 조직된 북한민주화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이러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한국정부에서 달가워하지 않으니 외롭다, 대통령각하께서 나서서 도와 달라...
“오케이. 알았다. 이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중국으로 탈북한 후 어려움이 없었는가? “왜 없었겠습니까. 밀선을 타고 한국에 입국하려다가 대련 항에서 중국공안에 붙잡혔습니다. 전 인민군 대위였고, 정치망명을 요구한다고 하자 웃기는 소리 그만하라면서 수갑을 채워 강제로 북한에 보냈습니다. 북한의 온성군 보위부에서 ‘반역자’의 감투를 쓰고 얻어맞다가 평양의 군 보위사령부로 호송되던 중 열차에서 뛰어 내려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고 1999년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용감하구만” “대통령각하, 고생을 했으면 저보다 열배는 더했고, 용감하면 저보다 백배는 더 용감한 탈북자들이 수천, 수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살기위하여...”
역시나 “알았다”고 말문을 막은 부시대통령이 이번에는 “한국 국민들이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당신은 김정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예기치 못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시대통령과의 면담직전에 우리가 만났던 NSC 국장은 대통령께서 개인적인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미리 해 주었었습니다. 짧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내가 통역을 맡은 분에게 ‘인민군대위’ ‘정치장교’ ‘친북단체’등의 대명사 번역을 준비해 두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또 다른 백악관 관계자가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족의 반역자 김정일을 찾아가 악수하는 순간부터 남한에서는 백성들과 김정일을 가려보지 못하는 일종의 몽유병이 감돌기 시작했고, 지금은 친북이 추세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을 미워하고 북한주민들을 사랑하는 진정한 우익 보수세력이 열심히 대항하고 있으며...” “오케이,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다”
“대통령 각하!” 이야기가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 갈까보아 무턱대고 외쳐버렸습니다. “대통령각하.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김정일을 용서할 수 있는 원수가 아니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주에! 이 밝은 세상에! 300만의 백성들을 굶어 죽게 만들고, 어제도 오늘도 끊임없는 공개총살을 명령하고 있는데! 그 쬐꼬만 놈이, 그,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가 위대한 지도자라는게 말이나 됩니까!”
이거라구야. 마음이 격해지자 눈에 눈물까지 맺히는게 창피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그 아까운 몇 초 동안 그냥 입술만 깨어 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부시대통령의 강열한 눈빛을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말해 보라는 듯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찡긋해 보였습니다. “그새끼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장엽선생님이 늘 하시는 이야기처럼 그놈은 신념도, 용기도, 비전도 없는 놈입니다. 김정일이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속은 텅텅 곯아 있습니다. 전번에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저 뒤에 계시는 힐 차관보가 김계관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렇게 원칙적으로 밀어붙이면 꽁지를 내려 버리는게 김정일이란 말입니다.”
한껏 격앙되어 있는 나에게 부시대통령은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래, 우리가 탈북자들을 돕고 북한주민들을 돕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 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남한생활과 북한민주화운동에서는 나의 선배이지만 고향 소학교에서는 후배임이 분명한 강철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부시대통령으로부터 그가 받았던 질문을 내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중국에서 떠돌고 있는 10여만의 탈북자 전체를 미국이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미국에 받아들이는 것은 본인들은 물론, 북한주민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권법이, 대통령각하께서 직접 싸인 하신 북한인권법이 하루빨리 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수잔쑐티와 북한자유연합이 주도한 북한자유주간의 취지도 그것이고 황장엽선생이 이끄는 우리 북한민주화위원회의 바램도 그것입니다. 다음으로, 북한주민들을 계몽하고 그들을 민주화운동에로 고무하기 위한 탈북자들의 단파방송, 북한으로의 삐라 보내기 위한 사업도 적극 지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일을 잘 알았다. 탈북자들을 미국에 받아들이는 일은 추진 중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이제 기자들을 불러들여 내가 직접 당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겠다”...
먼저 사진기자들이 들어와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는 관계자들의 안내에 따라 들어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질서 정연하게 ‘퇴장’을 했고, 이어 30여명의 또 다른 기자들이 TV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부시대통령을 마주 했습니다. 순간, 한미를 안고 응석을 받아주던 부시대통령의 미소 짓던 얼굴은 간곳이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눈앞에는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부시의 근엄한 모습만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아래는 그때, 부시대통령이 국내외 기자들을 통해 세계의 양심과 북녘형제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방금 전 내가 이곳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통령으로 재임한 후 가장 감동적인 만남중 하나를 가졌다. 나는 그녀의 딸과 그의 동생과 재회하기를 갈망하는 한 어머니와 오빠를 만났다. 그들은 북한 정부가 그들의 딸을 10대 일 때 납치함으로써 헤어져 살아왔다. 그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녀의 딸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한 국가가 납치를 조장한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미국인들에게는 어떤 국가의 지도자가 어린 아이의 납치를 부추긴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떼어놓는 것은 비정한 나라이지만, 바로 그것이 북한의 행위로 인해 이들 엄마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만일 북한이 세계에서 존경을 받길 원한다면, 그 나라부터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만 하고 이들 엄마가 그녀의 아이를 다시 껴안을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나는 또한 자유의 품에서 살고 싶어서 독재의 마수를 탈출한 한 젊은 북한인 가족과 얘기를 나눴다. 이 젊은 부부가 중국으로 가는 강을 건널 때 엄마는 5개월 된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그곳에서 자라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중국을 떠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의 장래에 대해 깊은 걱정을 하게 되었다. 아이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어떤 어머니나 아버지도 같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잔혹한 사회,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자라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신의 은총으로 어떤 숨을 곳을 찾았고, 아이는 태어났으며, 지금 이곳 백악관 집무실에 안전하게 앉아있다.
나는 또한 북한을 탈출한 한 용기 있는 사람과 얘기를 했다. 그는 북한군에 있었다. 그는 북한 정권의 야만적 속성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했고 그의 마음은 그것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쫓아 탈출했다. 그는 지금 북한을 탈출한 수천 명의 사람들,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자유와 그들이 인간답게 대우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웅변하고 있다.
세계는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과 맞서 싸울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놀라운 용기를 가진 사람들, 한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 전직 군인, 그리고 동생을 나의 집무실로 초대한 것은 나에게 영광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환영한다. 나는 여러분이 여기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미국이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임을 분명히 다짐한다. 우리는, 북한인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자유롭고 희망찬 세계에서 키울 수 있도록, 다시는 이런 어머니가 납치된 딸을 걱정하며 살지 않도록 하기위해, 자유를 위해 힘차게 노력할 것이다.
신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 있기를. 와 주셔서 감사하다.”
이렇게 이야기 한 부시대통령은 백악관을 나서는 우리들에게 볼펜과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넥타이핀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는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드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통령각하, 큰 뜻을 품고 한국으로 오신 황장엽선생을 모시고 우리 탈북자대표들이 다시 찾아뵙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나의 옛 중대장동지, 선전부장동지,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다시 한 번 희망을 품어 봅시다. 그렇게 오래가는 고통이라면 한번쯤 죽을 각오로 세상을 바꾸는 일꾼이 되는 용기를 가져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06년 5월 김성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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