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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 5년 - 이건강

안희환2 2009. 9. 9. 13:40

한국생활 5년 - 이건강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한다. 철없던 시절 친구와 함께 장난삼아 두만강을 건넌 것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7년 전 중국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으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중국 땅으로 오게 하였고 이것으로 부모님들과 가족들과 영원한 이별은 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나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의 자그마한 농촌마을이다. 봄이면 백살구꽃이 하얗게 피는 그곳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중소기업의 노동자로 일하였다. 아버님은 평생 목수로 보내셨고 어머님은 어려운 속에서도 부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부지런하신 분이였다.

중국에서 2년 동안의 생활과 한국에서의 5년 동안의 생활은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나의 현재 직업은 무역회사 기술담당 엔지니어이다. 구체적으로 일본의 초정밀 가공장비를 구입의사가 있는 고객에게 장비를 소개하고 작동시켜주며 고객의 개발품을 직접 TEST 해주어 우리 회사의 장비를 쓸 수 있게 유도한다. 장비를 구입하면 일본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장비교육 및 A/S를 맡아 고객의 기계를 관리하여준다. 그리고 대학 연구기관들, 기업체의 마이크로개발품들에 대하여 검토하고 설계→3차원모델링→프로그램→시제품을 제작하여 제공하는 업무도 맡고 있다.

마이크로가공 분야는 한국에서도 아직 어려운 부문이고 이것을 전공한 엔지니어도 많지 않은 상황이다. 모든 작업은 컴퓨터로 이루어진다. 대학에서 검퓨터응용기계를 전공하고 3년 동안 회사도 옮기고 하였지만 동일한 업무는 계속하여 하고 있다.

한국에 처음 와서는 진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북한에서 하던 것처럼 장사나 할까... 여러 가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하나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공부할 생각은 안했고 일정기간 이곳에서 생활해본 후에 진로를 찾아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로 나와서 며칠 안 있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기계과에 입학하였다. 기계부문은 북한에서도 다년간 일한 경험이 있고 또 그쪽에서 한 공부도 기계전공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부분의 기계는 컴퓨터로 이루어진다.

한국은 컴퓨터 없이는 못사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 공부는 시작하였으나 컴퓨터, 영어, 언어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컴퓨터 실력이라곤 하나원에서 익힌 워드 정도가 전부였고 영어 또한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는 괴물 같은 존재이다. 지금도 새로운 기술이나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지만 역시 프로그램은 역시 영어로 되어 있다. 지금은 그동안 고생한 덕분인지 눈치로 대충 넘긴다. 주변의 사람들은 나더러 컴퓨터를 굉장히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들이 다 쓰는 프로그램에 전공 프로그램 몇 개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지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새로운 기술도 내일이면 낡은 기술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지속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로 앞서갈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 후배들이 회사에 취직하여 올 때마다 나는 더욱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들은 좋은 대학을 졸업했으며 모든 부분에서 노력을 많이 한다. 며칠 전에 잠깐 만났던 친구는 그 만큼 공부하여 먹고살만하면 되지 무슨 공부를 또 하냐고 하였다.

난 지금 한국 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3학년이다. 우리 회사의 대부분의 자료들과 업무는 일본어와 영어로 이루어진다. 공부는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최고 대학 박사과정까지 하고 싶다. 지식 없는 소원은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아무리 천하를 옮길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하여도 지식이 받침 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대학은 수학공식이나 세상 살아가는 지식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인맥과 수많은 정보를 접하는 곳이다.

현재 한국에서 결혼하여 아내와 3살배기 딸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아내는 한국에 와서 생활한지 1년만인 대학교 1학년 때 만나 6개월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때 그녀는 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모대학병원 간호사였고 방학을 이용하여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여 결혼까지 오게 되였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결혼까지 성공하였고 현재는 애를 키우면서 집에서 잠깐 쉬고 있다.

“행하고자 하는 자 이룬다”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분을 굉장히 존경한다. 해는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떴다가 어김없이 지고 만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그 시간동안 개개인이 주어진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과 효율은 제각각이다. 나는 가끔씩 현재부터 살아가야할 날들을 계수하여본다. 현재 내 나이 31살 앞으로 길게 잡아 50년을 더 산다고 하여도 18,550일 여기에서 잠자는 시간, 질병과 노화로 움직일 수 없는 날들을 감안한다면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아갈 날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든 것은 다 시기와 때가 있다. 결혼, 직업, 학업 등은 노력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 질수 없다.

결혼 전 장인어르신이 나에게 3가지 조건을 걸으셨다. 아마도 얼마만큼 노력을 하나 보기위한 일종의 TEST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학시절 자격증 획득, 졸업과 동시에 회사 취직, 현재보다 나은 집으로 이사(당시에는 12평 국민임대주택)였다. 자격증 시험에는 3번 만에 어렵게 합격했다. 졸업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다해냈다. 지금도 처가의 부모님들과 자주 통화하고 기회가 되면 찾아뵙는다. 장인어르신에게는 막내사위가 아닌 막내아들이다. 잦은 국내외 출장과 학업으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스럽지만 장인어르신은 3살짜리 손녀가 보고 싶으시면 딸아이 하고만 전화하고 끊으신다.

정말 생활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한국에서 가족이라고는 처가의 가족들밖에 없다. 그리고 현재 행복한 우리가정,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서 집으로 들어가면 딸아이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고 노래를 부르는 딸아이의 재롱에 피곤은 저 멀리로 날아가곤 한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10년쯤 지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가족과 주변사람들 앞에 설까?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때로는 두렵기도 하다. 현재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소식지에 올릴 원고부탁을 받고 많이 망설였다. 며칠 전에 한국에 들어온 지 며칠밖에 안된 북한이탈주민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질문이 앞으로 한국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냐 하는 것이었다. 참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각 사람의 개성과 지식과 취향은 다르고 살아갈 의지도 다르다. 그래서 조급해 하지 말고 몇 개월 편안한 마음으로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나의 한국에서 살아온 5년간의 생활이 과연 현재 이곳에 오는 분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북한에서 왔다면 덮어놓고 인정을 안 해주는 사회, 좋은 대학 나와도 취직이 안 되는 이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 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래서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내가 이곳에 처음 와서 경험 했던 것들에 대하여 몇 가지만 후배들에게 조언하려고 한다.

첫째, 언어는 남한의 언어로 만들어라. 지금 남한에 정착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도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안다. 언어라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또한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개선될 수 없다. 그냥 내가 아는 편한 언어를 구사하여도 난 불편한 것이 없을 텐데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언어는 많은 사람들과 이질감을 조성한다. 같은 고향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인 것 같다. 그러면 언어는 어떻게 하면 빨리 익숙해질 수 있을까. 먼저 신문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신문에서 모르는 용어가 있으면 메모하였다가 한국 사람들한테 반드시 질문하는 습관을 기르면 좋다. 그리고 TV를 많이 시청하되 TV속에 등장하는 비슷한 나이또래의 연기자들의 발음을 연습하면 도움이 많이 된다. 또 뉴스에서 나오는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 문장들을 기억했다가 인터넷 및 주변 분들한테 질문하라. 또 한국어에는 수많은 외래어가 들어있다. 심지어 어떤 단어는 영어도 아니고 영어와 비슷하게 만들어낸 한국말도 있다. 꾸준히 노력한다면 1년 안에 한국 사람들이 아는 만큼의 영어단어는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문에 쓰이는 한자는 도합 200개 정도이다. 한자200개 정도만 알고 있다면 신문 읽는데 전혀 문제되질 않는다. 어쨌거나 될 수 있다면 이곳의 사람들과 접촉하고 많이 대화하라. 대화 중 북한사람인가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2년 정도 지나면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 없을 것이다.

둘째, 컴퓨터 실력을 높여라. 대학시절 잠깐 하나원에서 컴퓨터강의로 자원봉사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보니 굉장히 열심히 컴퓨터를 배우는 사람과 겁을 먹고 손도 못 대는 사람이 있었다. 워드프로세서 1급을 목표로 하여 공부하고 있는 20후반의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생각이 난다. 회사에 취직할 때 컴퓨터 실력을 질문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기본적인 것은 알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나이에 관계없이 3개월 정도만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물건이다. 한국에 컴퓨터가 대중화 된 것은 6-7년 정도 밖에 안 된다. 따라서 현재 60~70대의 대학교 교수님도 50~60에 컴퓨터를 공부했으니까. 지금은 3돌이 안된 우리 집 딸도 컴퓨터 게임을 능숙하게 한다.

셋째, 운전을 하라. 운전은 한국사회를 익히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어디에서 살던 언어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지리이다. 그리고 한국은 교통이 발달한 나라이며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4~5시간이면 갈 수 있는 자그마한 땅이다. 그리고 운전을 하면 활동범위가 넓어져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현재 나는 강원도에서 이글을 쓰고 있다. 본사는 서울에 있고 연구소는 강원도, 일은 부산, 대전, 청주 경기도, 서울과 같은 곳의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 일할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즉석에서 검토한다. 영업사원에게는 지도나 네이비게션이 필요 없다. 그러나 자신이 유지 가능한 차량을 소유해야한다. 아무리 작은 차라도 유지비가 30~40만원은 든다.

넷째, 가정은 생활의 활력소이다. 결혼 적정기를 넘겨서도 혼자 살게 되면 생활리듬을 읽게 된다. 그리고 방황하며 자금관리도 안된다. 또한 부양할 가족이 있으면 부담은 크지만 열심히 살게 된다. 할 수만 있으면 한국사람 중 배우자를 찾아라.

다섯째, 교회를 다녀라. 교회와 친구가 되라. 그러면 많은 교인들이 당신과 친구가 될 것이다. 교회는 내가 곧은길로 갈 수 있는 나침판과 같다. 교회의 어른들과 가깝게 지내라. 그들이 어려울 때 당신의 상담자가 되고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여섯째, 통장관리를 지혜롭게 하라. 목돈은 절대로 깨지 마라. 100만원에서 만원만 없으면 십만 원대가 된다. 돈이 모이면 보다 큰집으로 이사해라. 그 돈은 절대로 없어지질 않는다.

일곱째, 전문지식을 가져라.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전무한 속에서 과연 어떠한 전문지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지 고민들을 많이 한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정한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해본다.

20년 이상 써 먹을 수 있는 지식으로 한다. 어려울 땐 주위의 사람들과 상담하라. 책을 많이 읽고 컴퓨터를 적절히 이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