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겪은 판자촌 생활(83)
안양천은 판자촌의 아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이다. 놀 수 있는 것들도 별로 없고 놀 공간도 별로 가지지 못한 우리들에게 안양천마저 없었다면 지루한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강줄기가 아니고 그 위로 배를 띄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들에겐 한강(그 당시 한강에 가보지도 못했지만) 이상의 물줄기가 안양천이었다.
우리들은 안양천 고수부지에서 활싸움을 하거나 칼싸움을 했다. 쥐불놀이를 하기도 했고 달리기를 하기도 했다. 반면에 안양천에 들어가서는 수영을 하거나 스티로풀 배를 띄우고 그 위에 올라탄 후 상대를 떨어뜨리는 놀이를 했다. 옷을 적신 덕에 혼나는 일이 다반사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우리는 줄기차게 놀았다.
겨울에는 썰매를 만들어 탔다. 안양천 위로 얼어붙은 얼음은 제법 튼튼했고 아무리 세게 뛰어도 깨지지 않았다. 판자를 알맞게 자르고 양쪽 모서리에 막대기를 대고 주워온 굵은 철사를 그 막대기 위해 고정시키면 훌륭한 썰매가 되었다.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은 없었다. 어차피 너나할 것 없이 가난한 판자촌 아이들에게 스케이트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내가 교통사고로 팔을 잃은 후 더 이상 안양천에서 마음껏 뛰놀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개헤엄이나 개구리 수영이지만 그래도 물속에서 움직이곤 했는데 이제 한 팔로는 수영이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겨울철 썰매만 해도 그렇다. 양손으로 못이 박힌 나무토막을 휘둘러야 썰매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한 손으로 휘두르는 썰매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친밀하던 안양천과의 관계가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묘한 사실은 내가 안양천에서 멀어진 후 몇 년이 가기도 전에 안양천은 점점 아이들이 놀 수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공장의 폐수 때문이다. 함부로 쏟아 부은 공장의 폐수들이 안양천을 더럽히고 있었다. 또 하나는 축산 농가의 배설물들인데 더러운 짐승의 똥오줌은 안양천을 썩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더 이상 물에 들어갈 수 없게 되기 전에도 이미 물은 더러웠을 것이다. 그 속에서 놀던 아이들이 무지했을 뿐이지.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안양천에서 수영하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나라의 형편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판자촌의 아이들은 가난했고 놀만한 물건도 공간도 없었는데 말이다. 어느 날 포크레인이 안양천에 들어가 흙을 퍼내는 것을 보았는데 퍼낸 흙의 색깔은 흔히 아는 흙색이 아니라 검은 색이었다. 그것도 아주 짙은 검은색. 물만이 아니라 땅 속까지 썩어있었던 것이다.
안양천을 살리기 위한 운동들이 꽤 있었다. 지금 안양천 물이 얼마나 깨끗해졌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시에서도 정책적으로 노력을 펼쳤기 때문에 많이 맑아지긴 했을 것이다. 또 고수부지 곳곳에는 운동시설이 설치되었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로도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어린 우리들이 뛰놀던 안양천은 없다. 가끔 그것을 생각하면 그리움이 달려든다. 아무리 안양천이 깨끗해져도 이제는 그 속에 뛰어들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 왠지 서글프다.
이제 어른이 된 나 역시 안양천에 뛰어들 일은 없고 내 아이들 역시 안양천에서 수영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함께 수영하던 친구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때로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던 그 친구들, 함께 썰매를 타며 얼어붙은 안양천 위를 질주하던 그 친구들 말이다. 그 친구들도 나처럼 안양천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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