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교회에서 통곡하는 소년/안희환
어릴 적 겪은 판자촌 생활(74)
서러움이 쌓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털어버려야 한다. 응어리가 계속 쌓이다 보면 인격을 망가지고 사람 자체가 부정적인 사람으로 바뀌기 쉽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처럼 마음속에 응어리를 쌓아갈 만한 상황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쏟아놓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혼자 교회에 가서 우는 것이었다.
사실 교회를 다니긴 했어도 장난치고 까부는 것에 집중했지 제대로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배우거나 하진 않았다. 때로는 어머니의 꾸지람이 두려워 할 수 없이 교회에 가기도 했고.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에 팔까지 하나 잃은 채 학교까지 일 년 쉬고 난 뒤 후배들과 함께 공부하는 처지가 되다 보니 장난치면서 들었던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 절실해졌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고 유창한 기도는 더더욱 할 수 없었지만 그냥 교회 앞자리에 가서 우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눈물샘이 고장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긴 세월 한 맺힌 인생을 살았던 노인도 아닌데,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의 어린아이일 뿐인데, 꺼이꺼이 울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님이란 존재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인지 아니면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진 것인지는 몰라도(그 당시에) 한결 안정된 마음 상태를 경험한 나는 매일같이 교회에 들려 기도라는 것을 했다. 한 일 년 가까이는 제대로 기도하지도 못한 채 울고 또 우는 시간이 이어졌지만 그 덕분에 우울한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점차 내 기도는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조금씩 분명해졌다. 결국 내 기도는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아버지를 사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내 속엔 아버지를 향한 뿌리 깊은 미움이 있었다. 내가 크고 나면 아버지는 늙어버릴 것이고 힘도 없어질 것이니 그때 그냥 두지 않겠다는 복수심도 있었다. 주정뱅이에다가 노름장이에다가 툭 하면 엄마를 괴롭히는 아버지의 존재는 없는 게 나은 그런 존재였다.
두 번째는 내 꿈과 관련된 것인데 천막교회에서 설교하시는 전종수 목사님을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고 나도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했었다. 한번은 성경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접했는데 지체가 덜한 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팔 하나가 없는 나는 그 내용을 오해한 채 상심이 되었는데 전목사님이 상관없다며 위로해 주셨다.
세 번째는 학생들에게 중요할 수밖에 없는 공부에 대한 것이었다. 안으로 움츠려드는 초라한 나의 모습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는 내게 공부까지 바닥을 헤맨다면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고 그 때문에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나님이 정말 계셔서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머리 하나 좋게 해주는 것은 일도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과거를 떠올리면 너저분한 천막교회의 앞자리에서 울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울고 또 울어도 그치지 않던 눈물, 나중엔 서러움에 복받쳐 통곡을 하던 시간들, 이제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금의 나를 사랑한다. 천막교회에 다니게 된 계기를 감사한다.
얼마 전에도 그 천막교회에 다녀왔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교회는 아직도 천막교회로 남아 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 지역 전체가 재개발되면서 그 천막교회도 헐리고 대신 종교부지를 제공하기로 했다는데 번듯한 교회가 지어질는지 모르겠다. 비록 천막교회가 사라지긴 하겠지만 내 추억 속의 천막교회는 내 존재만큼이나 길게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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